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신면주(申冕周 ; 1768∼1845)의 자는 성지(成之), 호는 시남(市南),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아버지는 홍교(弘敎)이며,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상정의 학통을 이어받아 하늘과 인간의 진리, 사단과 칠정의 본질 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805년(순조 5)에 문과에 제하여 이조좌랑·사헌부지평·함경도도사·춘추관기주관 등을 역임하였다. 지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부정(漁父亭)`을 짓고 학도들을 불러들여 후진 양성을 부지런히 하였다.
신면주(申冕周)[1768~1845]는 1768년(영조 44) 7월 22일 경상도 의성현 교전리(校前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두각을 보여 5세에 글자를 알았고, 7~8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14세 때에는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형 신면조(申冕朝)와 함께 어부정(漁父亭)을 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여, 이미 생원시에 합격했던 신면조와 함께 형제가 나란히 성균관의 적(籍)을 가지게 되었다. 1805년(순조 5)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곧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10년(순조 10) 율봉도 찰방(栗峰道 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과 병조 좌랑(兵曹 佐郞)에 임명되었으나, 형 신면조와 모친, 그리고 외아들 신명협(申命協)의 상사가 잇따라 일어나 고향에 머물러야 했다.
1821년(순조 21)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1822년(순조 22) 이조 좌랑(吏曹 佐郞)에 임명되었으며, 1825년(순조 25)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을 겸직하였다. 이어 1826년(순조 26)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과 함경도 도사(咸鏡道 都事)를 역임한 후, 1828년(순조 28)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에 임명되어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임하였으나, 당시 대리청정 중이었던 효명 세자(孝明 世子)에게 병환을 이유로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829년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며, 이어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 홍문관 교리 등에 차례로 임명되며 세자와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만장(挽章)을 지었다. 이어 이듬해까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교리, 다시 사헌부 집의 등에 임명되나 병환으로 오래 관직에 있지를 못하였다. 한편, 신면주는 효명세자 사후 홍문관에 있으면서 효명세자의 측근들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이 효명 세자 대리청정 때 전권을 휘둘렀다는 이유에서이다. 우선 단독으로 상소를 올려 효명 세자의 최측근이었던 김로(金鏴)와 그와 체결한 이속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또한 김노경(金魯敬)의 국청을 요구하는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참여하기도 했다.
1834년(헌종 즉위년) 순조 장례 때 봉폐관(封閉官)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35년(헌종 1)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헌종을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소학(小學)』을 강론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집의,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환이 도져 사직을 요청하였고, 헌종은 사직하는 신면주에게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렸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내린 윤음을 기록한 것이다.
은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845년(헌종 11)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이상정(李象靖)의 학통을 계승한 가학을 이어 받았다. 학문이 뛰어나 당시 영남 출신으로 드물게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수시로 경연·서연에 참석해 학문을 강론하였다. 유고(遺稿)인 4권 1책의 『시남선생유고(市南先生遺稿)』가 전해진다. 이 책은 4세손 신석기(申碩基)가 1981년 편집·영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면주가 홍문관 교리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 명승지를 유람하고 작성한 기행문, 그리고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장례 때 지은 「왕세자만(王世子挽)」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남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신면주(申冕周 ; 1786∼1845)의시문집이다. 신면주의 자는 성지(成之), 호는 시남(市南), 본관은아주(鵝洲)이다.
이 책은 1981년 4대손석기(碩基) 등이 편집, 영인하였다. 시는「강태극도설(講太極圖說)」등유가의 학설과 관련된 것,「동고관등경차백씨운(東皐觀燈敬次伯氏韻)」등 차운시와 만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왕세자만(王世子挽)」은 1830년(순조 30) 왕세자의 장례 때 지은 배율 140운의 시로서, 조정의 신하들이 감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기행시로「속리산법주사배백씨차제우운(俗離山法住寺陪伯氏次諸友韻)」·「문장대(文藏臺)」·「고정(古鼎)」·「금강굴(金剛窟)」·「천불암(千佛庵)」등이 있다. 소의「사교리소(辭校理疏)」는 1828년교리를 사직하며 올린 충언(忠言)의 글로서 끝에 성학사도(聖學四圖)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계(啓)는 경연관으로 입시하여 왕·왕세자와 『서전(書傳)』·『소학』등을 강론한 내용이다. 홍문관에서 활동한 저자의 성리학적인식을 알 수 있다.
신면주의 아버지는 홍교(弘敎)이며,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상정의 학통을 이어받아 하늘과 인간의진리, 사단과 칠정의 본질 등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1805년(순조 5)에 문과에 제하여 이조좌랑·사헌부지평·함경도도사·춘추관기주관등을 역임하였다. 지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부정(漁父亭)`을 짓고학도들을 불러들여 후진 양성을 부지런히 하였다.
[운곡집 이희발] 申冕周에게 보낸 편지이다.신면주의 형이 중망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그와 아울러 유사가 선출되지 못하였으니兩邑의 본손 중에 두 사람을 선출하여 책임을 맡기도록 하자고 하였다
[학서집 柳台佐] 생전에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면서 따르던鶴棲의 죽음을 두고 그간의 지낸 정의와 공의 행적을 서술하고 아울러 비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